2013 지학순 정의평화상 수상자 넬레스 끄바다비 뜨바이 신부
-인도네시아 빠뿌아 분쟁의 피를 씻고 평화적 대화의 문을 여는 사람
아시아저널(No.7), Aug.31, 2013 (자카르타)
신부의 여권은 세 겹이었다. 2014년 11월 만료를 앞둔 세 겹째의 여권도 이제 한 장 남았다. 넬레스 끄바다비 뜨바이(Neles Kebadabi Tebay)신부는 오슬로로, 사라예보로, 웰링턴으로, 암스테르담으로 날아다닌다. 지난 1961년부터 시작된 인도네시아 빠뿌아 분쟁을 해결하고 빠뿌아 평화 정착을 위해서다. 그는 쉬지 않고 빠뿌아 분리독립운동게릴라, 세계 각지의 평화운동가, 정부 관료와 외교관, 군경찰, 빠뿌아에서 지하자원을 개발하는 외국기업인들과 접촉해왔다. 신부는 스스로 인도네시아 정부와 빠뿌아 분리독립계열의 평화회담 성사를 위해“정글부터 대통령궁까지 갔다.”고 말한다.
지난 3월에는 서울과 원주, 제천을 방문했다. 2013 지학순정의평화상 수상길이었다. 이 상을 계기로 넬레스 신부가‘빠뿌아평화네트워크(Papua Peace Network)’와 함께 빠뿌아 분리독립계와 인도네시아 정부 사이의 평화적 대화를 중재해 온 지난 10년간의 노력이 인도네시아 내외에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파푸아는 적도 아래 위치한 섬으로 서쪽은 네덜란드, 동쪽은 영국 식민통치를 받았다. 동쪽은 1975년 파푸아뉴기니로독립했지만, 서쪽은 1963년 5월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 수까르노가 인도네시아 영토로 선언했다. 이미 1961년 12월 서빠뿌아에서는 원주민들이 아침별기(Morning Star Flag)를 게양, 서빠뿌아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유혈충돌이 시작됐다. 이후 수하르또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파견됐고, 1970년~80년대 수하르또 집권기에는 수천명에 이르는 주민이 살해당하면서 일상적 긴장과 충돌이 이어지고 있다.
“빠뿌아인들이 내 이름의 뜻을 언급하며 평화회담 언제 이루어지냐고 보챈다.”신부는 하얀 이를 드러내는 특유의 웃음으로 말했다. 1992년 자야뿌라 천주교구에서 사제서품을 받을 때 갖게 된 가운데 이름 끄바다비(빠뿌아 원주민인 미Mee족어로‘문을 여는 사람’)와 성 뜨바이‘( 정화하다, 씻다’는 뜻) 때문이다.
지난 3월 9일과 6월 29일자카르타에서 넬레스 신부를 만났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 지학순정의평화상 수상 소감은?
먼저 이 상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직 빠뿌아 평화 대화가 성사되지 않았는데, 내가 수상할 자격이 있는가 하는 거다. 우리는 아직 빠뿌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평화적 대화를 준비해나가고 있는 단계다. 두 번째로 이 상을 받게 되면서 내가 바른 길로 잘 가고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또 하나 이번 지학순정의평화상은 평화적 대화를 위해 힘써온 모든 사람들-기자, 학자, 정치인, 활동가 등-에게 주어진 상이다. 이번 상으로 인도네시아 정부가 평화적 대화 추진에 대한 힘을 받을 것으로 본다. 인도네시아 정부와 빠뿌아인들 사이에 대화를 통한 갈등 해결 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 빠뿌아 문제 해결을 위한 평화적 대화에 대해 설명해 달라.
첫 아이디어는 지난 2000년에 있었던 파푸아 제2차 회의에서 나왔다. 당시 1000여명의 빠뿌아인들이 빠뿌아주도 자야푸라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다. 이 때 평화적 대화와 교섭을 빠뿌아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으로 합의했다.
■ 신부님의 본격적 활동은 어떻게 시작됐나?
2001년에 언론기고를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주요 일간신문에 빠뿌아 문제 해결을 위한 평화적 대화가 필요하다는 내용의 칼럼 등을 보냈다. 2000년부터 2011년까지 모두 54편의 칼럼이 게재됐다. 2009년에는 LIPI(인도네시아 사회과학원) 내 빠뿌아 문제 연구팀에 합류했다. LIPI에는 이미 무리단 박사를 중심으로 2004년부터 2008년까지 빠뿌아 문제를 다루는 연구.조사팀이 꾸려져 있었다. 당시 4년에 걸친 연구조사 내용은 '빠뿌아로드맵(Papua Road Map)'이라는 책으로 발간됐다. 이 책에서는 빠뿌아 문제의 4가지 기본 골자가 조명돼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1-빠뿌아가 어떻게 인도네시아에 통합됐는가. 2- 중앙정부의 빠뿌아 정책. 3- 빠뿌아인들에 대한 차별과 소외. 4- 빠뿌아 개발정책 실패가 그것이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 덧붙여 자카르타와 빠뿌아간 대화에 대한 소책자‘자카르타와 빠뿌아간 대화-빠뿌아의 관점’을 준비했고, 2009년 3월 11일에 발간했다. 이 책은 파푸아 사람들에게 오랜 빠뿌아 문제 해결을 위한 평화적 대화를 제안한 첫 출판물이었다.
■ 빠뿌아평화네트워크가‘평화적 대화’중재의 본부인 것으로 안다.
2010년 1월 빠뿌아의 젊은 봉사자를 중심으로 결성된 단체다. 처음 19명에서 현재45명으로 늘었다. 내가 빠뿌아평화네트워크 빠뿌아 지역 코디네이터를 맡고 있고 인도네시아사회과학원 무리단 교수가 자카르타 코디네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단체의 목적은 빠뿌아에 대한 평화 대화 지지를 얻는 것이다. 빠뿌아 내 19개 지역에서 50여명이 참석한 공개회담을 가졌다.
■평화대화 조성활동에 대한 빠뿌아인들의 반응은 어땠는가?
처음에는 많은 빠뿌아인들이 화를 내며 동의하지 않았다. 대개의 반응은 "우리가 빠뿌아 독립 청원서를 위해 투쟁해왔는데 왜 대화를 하자는 거냐?"는 거였다. 인도네시아 정부측에서는 "빠뿌아에 특별자치법을 통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공했다. 대화가 왜 필요한가?"하는 반응이었다. 특히 중앙정부는 빠뿌아를 위한 평화적 대화라는 방법을 분리주의의 일종으로 받아들였고, 빠뿌아를 위한 대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즉각 빠뿌아 독립을 지지하는 사람으로 간주했다. 빠뿌아인인 나는 평화적 대화를 설득해오면서 정부로부터 분리주의자란 낙인이 찍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많은 이들이 빠뿌아 평화 대화라는 아이디어에 지지보다는 반대 의사를 보였다. 정부로부터 분리주의자란 낙인이 찍히는 순간 정부의 적이 되는 거니까. 누구도 함부로 빠뿌아 대화라는 걸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정부와 빠뿌아 양쪽으로부터 깊은 의심의 눈총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런 의심의 눈길은 오히려 내가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다는 신호로 보였다.
■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평화적 대화를 알리고 설득했나?
언론을 통해서다. 2009년 한해는 꼬박 자카르타-빠뿌아 평화적 대화를 알리는 데 썼다. 2009년말에 성과가 나타났다. 일간신문에 빠뿌아 문제에 관한 '평화적 대화'라는 표현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사람들 입길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한 때는 금기였던 ‘대화를 통한 평화 정착’을 두고 반대한다 지지한다는 얘기가 시작된 것은 큰 변화였다. 이제는 양측을 직접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여기서 '빠뿌아, 평화의 땅'이라는 비전이 나왔다. 우리는 정부와 빠뿌아 분리주의자들을 찾아가 빠뿌아를 평화의 땅으로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할 수 있는지 묻기 시작했다. 국군과 경찰, 빠뿌아 지하자원을 개발해 가져가는 민간기업에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빠뿌아를 평화의 땅으로 만들기 위해 당신은 무엇을 기여할 수 있는가?
■ 빠뿌아 분리주의 운동 분파들도 일일이 만났다고 들었는데?
모두 12명의 분리주의 분파 지도자들을 만났다. 이들 모두 각자 빠뿌아 독립을 위해 투쟁해오던 사람들이다. 전화를 걸어 그들 집으로 찾아가 만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물론 이런 쇼핑몰(기자와 넬레스 신부는 자카르타 플라자 인도네시아 스타벅스에서 만났다)에서 만날 수도 있겠지만 집이나 사무실로 직접 방문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이런 개인적 방문과 만남을 통해 그들에 대한 인간적 존중과 존경심을 표현하고싶었다. 그들이 어떻게 빠뿌아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됐는지, 빠뿌아의 평화를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등에 대해 긴 대화를 나눴다.
■ 국외에 있는 빠뿌아 망명자들도 방문했다고 들었다.
현재 국외 빠뿌아 망명인들은 파푸아 뉴기니에 최소 25,000명, 네덜란드에 2,000명, 호주에 100명 정도 있다. 이 곳을 모두 방문했다. 처음에는 입국이 쉽지 않았다. 나 역시 빠뿌아 독립을 위해 운동하는 분리주의자로 오해받아서. 그러나 결국 입국해 빠뿌아 망명인들을 만났고 그들로부터 빠뿌아 평화를 위한 대화 방식에 대한 지지를 얻어냈다. 나는 빠뿌아 정글에서부터 자카르타 대통령궁까지 갔다.
■ 역대 정권의 빠뿌아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각각의 대통령이 모두 자신만의 대(對)빠뿌아정책을 보였다. 수까르노 초대 대통령의 경우 빠뿌아를 상업화했다. 수하르또 대통령은 미국광산회사 프리포트의 빠뿌아 진출을 허가했고, 이로부터 많은 인권폭력이 발생했다. 수하르또 정권하에서 많은 군작전들이 진행됐으며 이주정책이 있었다. 하비비 대통령은 좋았다. 100명의 빠뿌아인들이 독립광장에서 직접 자신들의 문제를 말할 수 있었다. 또 당시 역대 처음으로 빠뿌아인들이 대통령을 직접 대면했고 그들의 요구사항을 경청했다. 그리고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 어떻게 바뀌었나?
구스둘(압두라만 와히드 대통령 별칭)에 와서는 빠뿌아의 행정구역이‘이리안 자야’에서 빠뿌아로 공식 변경됐다. 그는 빠뿌아 고유의 깃발인 아침별기가 인도네시아 국기와 나란히 게양되는 것을 허용했다. 아침별기가 인도네시아 국기보다 조금 낮은 곳에 위치했지만 말이다. 구스둘은 빠뿌아인들이 (지난 2000년 평화정착을 위한 대화결의가 도출됐던) 제2차 빠뿌아인대회 개최를 허락하기도 했다. 그래서 현재 빠뿌아인들은 수하르또를 독재자로, 구스둘을 민주주의자, 휴머니스트(인도주의자), 다원주의자로 본다. 구스둘 이후 메가와띠 대통령은 특별자치법 위반성에도 불구하고 빠뿌아를 새로 서빠뿌아주를 구성해 두 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눴다. 만약 현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정권 하에서 평화적 대화가 성사된다면, 그것이 유도요노의 대빠뿌아 정책의 대표적 사례로 기억될 것이다.
■ 자카르타-빠뿌아간 대화 중재 최근 활동은?
올해 1월과 3월 부통령사무실, 정치조정부와 내무부에서 자카르타-빠뿌아 대화를 논의한 것으로 알고 있다. 지난 2월 넷째주에는 빠뿌아평화네트워크와 인도네시아사회과학원이 주도해 자카르타 정부관료와 빠뿌아 평화운동가들이 발리 덴빠사르에 모여 첫 탐색회의를 가졌다. 이어 4월 넷째주 술라웨시 마나도에서 두 번째 만남을 가졌고 세 번째 만남은 8월로 예상하고 있다. 이런 만남은 평화 대화의 사전 정지작업에 해당한다. 그래서 탐색회의다.
지난 3월에는 서울과 원주, 제천을 방문했다. 2013 지학순정의평화상 수상길이었다. 이 상을 계기로 넬레스 신부가‘빠뿌아평화네트워크(Papua Peace Network)’와 함께 빠뿌아 분리독립계와 인도네시아 정부 사이의 평화적 대화를 중재해 온 지난 10년간의 노력이 인도네시아 내외에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파푸아는 적도 아래 위치한 섬으로 서쪽은 네덜란드, 동쪽은 영국 식민통치를 받았다. 동쪽은 1975년 파푸아뉴기니로독립했지만, 서쪽은 1963년 5월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 수까르노가 인도네시아 영토로 선언했다. 이미 1961년 12월 서빠뿌아에서는 원주민들이 아침별기(Morning Star Flag)를 게양, 서빠뿌아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유혈충돌이 시작됐다. 이후 수하르또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파견됐고, 1970년~80년대 수하르또 집권기에는 수천명에 이르는 주민이 살해당하면서 일상적 긴장과 충돌이 이어지고 있다.
“빠뿌아인들이 내 이름의 뜻을 언급하며 평화회담 언제 이루어지냐고 보챈다.”신부는 하얀 이를 드러내는 특유의 웃음으로 말했다. 1992년 자야뿌라 천주교구에서 사제서품을 받을 때 갖게 된 가운데 이름 끄바다비(빠뿌아 원주민인 미Mee족어로‘문을 여는 사람’)와 성 뜨바이‘( 정화하다, 씻다’는 뜻) 때문이다.
지난 3월 9일과 6월 29일자카르타에서 넬레스 신부를 만났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 지학순정의평화상 수상 소감은?
먼저 이 상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직 빠뿌아 평화 대화가 성사되지 않았는데, 내가 수상할 자격이 있는가 하는 거다. 우리는 아직 빠뿌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평화적 대화를 준비해나가고 있는 단계다. 두 번째로 이 상을 받게 되면서 내가 바른 길로 잘 가고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또 하나 이번 지학순정의평화상은 평화적 대화를 위해 힘써온 모든 사람들-기자, 학자, 정치인, 활동가 등-에게 주어진 상이다. 이번 상으로 인도네시아 정부가 평화적 대화 추진에 대한 힘을 받을 것으로 본다. 인도네시아 정부와 빠뿌아인들 사이에 대화를 통한 갈등 해결 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 빠뿌아 문제 해결을 위한 평화적 대화에 대해 설명해 달라.
첫 아이디어는 지난 2000년에 있었던 파푸아 제2차 회의에서 나왔다. 당시 1000여명의 빠뿌아인들이 빠뿌아주도 자야푸라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다. 이 때 평화적 대화와 교섭을 빠뿌아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으로 합의했다.
■ 신부님의 본격적 활동은 어떻게 시작됐나?
2001년에 언론기고를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주요 일간신문에 빠뿌아 문제 해결을 위한 평화적 대화가 필요하다는 내용의 칼럼 등을 보냈다. 2000년부터 2011년까지 모두 54편의 칼럼이 게재됐다. 2009년에는 LIPI(인도네시아 사회과학원) 내 빠뿌아 문제 연구팀에 합류했다. LIPI에는 이미 무리단 박사를 중심으로 2004년부터 2008년까지 빠뿌아 문제를 다루는 연구.조사팀이 꾸려져 있었다. 당시 4년에 걸친 연구조사 내용은 '빠뿌아로드맵(Papua Road Map)'이라는 책으로 발간됐다. 이 책에서는 빠뿌아 문제의 4가지 기본 골자가 조명돼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1-빠뿌아가 어떻게 인도네시아에 통합됐는가. 2- 중앙정부의 빠뿌아 정책. 3- 빠뿌아인들에 대한 차별과 소외. 4- 빠뿌아 개발정책 실패가 그것이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 덧붙여 자카르타와 빠뿌아간 대화에 대한 소책자‘자카르타와 빠뿌아간 대화-빠뿌아의 관점’을 준비했고, 2009년 3월 11일에 발간했다. 이 책은 파푸아 사람들에게 오랜 빠뿌아 문제 해결을 위한 평화적 대화를 제안한 첫 출판물이었다.
■ 빠뿌아평화네트워크가‘평화적 대화’중재의 본부인 것으로 안다.
2010년 1월 빠뿌아의 젊은 봉사자를 중심으로 결성된 단체다. 처음 19명에서 현재45명으로 늘었다. 내가 빠뿌아평화네트워크 빠뿌아 지역 코디네이터를 맡고 있고 인도네시아사회과학원 무리단 교수가 자카르타 코디네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단체의 목적은 빠뿌아에 대한 평화 대화 지지를 얻는 것이다. 빠뿌아 내 19개 지역에서 50여명이 참석한 공개회담을 가졌다.
■평화대화 조성활동에 대한 빠뿌아인들의 반응은 어땠는가?
처음에는 많은 빠뿌아인들이 화를 내며 동의하지 않았다. 대개의 반응은 "우리가 빠뿌아 독립 청원서를 위해 투쟁해왔는데 왜 대화를 하자는 거냐?"는 거였다. 인도네시아 정부측에서는 "빠뿌아에 특별자치법을 통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공했다. 대화가 왜 필요한가?"하는 반응이었다. 특히 중앙정부는 빠뿌아를 위한 평화적 대화라는 방법을 분리주의의 일종으로 받아들였고, 빠뿌아를 위한 대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즉각 빠뿌아 독립을 지지하는 사람으로 간주했다. 빠뿌아인인 나는 평화적 대화를 설득해오면서 정부로부터 분리주의자란 낙인이 찍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많은 이들이 빠뿌아 평화 대화라는 아이디어에 지지보다는 반대 의사를 보였다. 정부로부터 분리주의자란 낙인이 찍히는 순간 정부의 적이 되는 거니까. 누구도 함부로 빠뿌아 대화라는 걸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정부와 빠뿌아 양쪽으로부터 깊은 의심의 눈총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런 의심의 눈길은 오히려 내가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다는 신호로 보였다.
■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평화적 대화를 알리고 설득했나?
언론을 통해서다. 2009년 한해는 꼬박 자카르타-빠뿌아 평화적 대화를 알리는 데 썼다. 2009년말에 성과가 나타났다. 일간신문에 빠뿌아 문제에 관한 '평화적 대화'라는 표현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사람들 입길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한 때는 금기였던 ‘대화를 통한 평화 정착’을 두고 반대한다 지지한다는 얘기가 시작된 것은 큰 변화였다. 이제는 양측을 직접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여기서 '빠뿌아, 평화의 땅'이라는 비전이 나왔다. 우리는 정부와 빠뿌아 분리주의자들을 찾아가 빠뿌아를 평화의 땅으로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할 수 있는지 묻기 시작했다. 국군과 경찰, 빠뿌아 지하자원을 개발해 가져가는 민간기업에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빠뿌아를 평화의 땅으로 만들기 위해 당신은 무엇을 기여할 수 있는가?
■ 빠뿌아 분리주의 운동 분파들도 일일이 만났다고 들었는데?
모두 12명의 분리주의 분파 지도자들을 만났다. 이들 모두 각자 빠뿌아 독립을 위해 투쟁해오던 사람들이다. 전화를 걸어 그들 집으로 찾아가 만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물론 이런 쇼핑몰(기자와 넬레스 신부는 자카르타 플라자 인도네시아 스타벅스에서 만났다)에서 만날 수도 있겠지만 집이나 사무실로 직접 방문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이런 개인적 방문과 만남을 통해 그들에 대한 인간적 존중과 존경심을 표현하고싶었다. 그들이 어떻게 빠뿌아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됐는지, 빠뿌아의 평화를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등에 대해 긴 대화를 나눴다.
■ 국외에 있는 빠뿌아 망명자들도 방문했다고 들었다.
현재 국외 빠뿌아 망명인들은 파푸아 뉴기니에 최소 25,000명, 네덜란드에 2,000명, 호주에 100명 정도 있다. 이 곳을 모두 방문했다. 처음에는 입국이 쉽지 않았다. 나 역시 빠뿌아 독립을 위해 운동하는 분리주의자로 오해받아서. 그러나 결국 입국해 빠뿌아 망명인들을 만났고 그들로부터 빠뿌아 평화를 위한 대화 방식에 대한 지지를 얻어냈다. 나는 빠뿌아 정글에서부터 자카르타 대통령궁까지 갔다.
■ 역대 정권의 빠뿌아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각각의 대통령이 모두 자신만의 대(對)빠뿌아정책을 보였다. 수까르노 초대 대통령의 경우 빠뿌아를 상업화했다. 수하르또 대통령은 미국광산회사 프리포트의 빠뿌아 진출을 허가했고, 이로부터 많은 인권폭력이 발생했다. 수하르또 정권하에서 많은 군작전들이 진행됐으며 이주정책이 있었다. 하비비 대통령은 좋았다. 100명의 빠뿌아인들이 독립광장에서 직접 자신들의 문제를 말할 수 있었다. 또 당시 역대 처음으로 빠뿌아인들이 대통령을 직접 대면했고 그들의 요구사항을 경청했다. 그리고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 어떻게 바뀌었나?
구스둘(압두라만 와히드 대통령 별칭)에 와서는 빠뿌아의 행정구역이‘이리안 자야’에서 빠뿌아로 공식 변경됐다. 그는 빠뿌아 고유의 깃발인 아침별기가 인도네시아 국기와 나란히 게양되는 것을 허용했다. 아침별기가 인도네시아 국기보다 조금 낮은 곳에 위치했지만 말이다. 구스둘은 빠뿌아인들이 (지난 2000년 평화정착을 위한 대화결의가 도출됐던) 제2차 빠뿌아인대회 개최를 허락하기도 했다. 그래서 현재 빠뿌아인들은 수하르또를 독재자로, 구스둘을 민주주의자, 휴머니스트(인도주의자), 다원주의자로 본다. 구스둘 이후 메가와띠 대통령은 특별자치법 위반성에도 불구하고 빠뿌아를 새로 서빠뿌아주를 구성해 두 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눴다. 만약 현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정권 하에서 평화적 대화가 성사된다면, 그것이 유도요노의 대빠뿌아 정책의 대표적 사례로 기억될 것이다.
■ 자카르타-빠뿌아간 대화 중재 최근 활동은?
올해 1월과 3월 부통령사무실, 정치조정부와 내무부에서 자카르타-빠뿌아 대화를 논의한 것으로 알고 있다. 지난 2월 넷째주에는 빠뿌아평화네트워크와 인도네시아사회과학원이 주도해 자카르타 정부관료와 빠뿌아 평화운동가들이 발리 덴빠사르에 모여 첫 탐색회의를 가졌다. 이어 4월 넷째주 술라웨시 마나도에서 두 번째 만남을 가졌고 세 번째 만남은 8월로 예상하고 있다. 이런 만남은 평화 대화의 사전 정지작업에 해당한다. 그래서 탐색회의다.
<넬레스 끄바다비 뜨바이 신부의 약력>
-1964년 인도네시아 빠뿌아주(州) 도기야이구(區) 고디데 출생.
-1990년에 빠뿌아주 아베뿌라 소재 자야뿌라 동빠자르 신학교(STFT)를 졸업하고 1992
년 자야뿌라 교구에서 천주교 사제 서품을 받았다.
-2006년 이탈리아 로마교황우르반대학에서 <‘화해와 참회’의 빛을 위한 서빠뿌아 교
당의 화해임무> 논문으로 선교학 박사학위를 받고 2007년부터 자야뿌라 동빠자르 신
학교(STFT) 선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0년부터 빠뿌아평화네트워크(PPN) 코
디네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출판물로는『빠뿌아: 평화적 해결을 위한 문제와 가능성』(2008, 자야뿌라 천주교
구, 인도네시아),『 빠뿌아인의대화를위해펜을들다』(2012, 인터피데이, 인도네시아)
등이 있다.
-1964년 인도네시아 빠뿌아주(州) 도기야이구(區) 고디데 출생.
-1990년에 빠뿌아주 아베뿌라 소재 자야뿌라 동빠자르 신학교(STFT)를 졸업하고 1992
년 자야뿌라 교구에서 천주교 사제 서품을 받았다.
-2006년 이탈리아 로마교황우르반대학에서 <‘화해와 참회’의 빛을 위한 서빠뿌아 교
당의 화해임무> 논문으로 선교학 박사학위를 받고 2007년부터 자야뿌라 동빠자르 신
학교(STFT) 선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0년부터 빠뿌아평화네트워크(PPN) 코
디네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출판물로는『빠뿌아: 평화적 해결을 위한 문제와 가능성』(2008, 자야뿌라 천주교
구, 인도네시아),『 빠뿌아인의대화를위해펜을들다』(2012, 인터피데이, 인도네시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