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 난민 샤녹난 루암삽(Chanoknan Ruamsap) 인터뷰
광주트라우마센터 계간 그라지라(No.11), Dec.06, 2019 (Seoul)
한국에 거주하는 유일한 타이 난민 샤녹난 루암삽 씨(26)는 왕실모독죄 위반 혐의로 타이 검찰의 소환 통지를 받은 지 9시간 만에 한국 망명길에 올라 2018년 1월 17일 광주로 피신했다. 그녀는 타이 명문 쭐라롱꼰 대학 재학 중 대학생 교복 의무 착용 반대, 왕실모독죄 폐지, 군부 쿠데타 반대 운동에 참여하면서 군부의 지속적인 감시와 협박을 당해 온 학생 민주화 운동가다. 2년 가까이 광주에 거주하던 샤녹난씨는 최근 광주를 떠나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시민의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폭력을 피해 한국에서 경계인으로 살고있는 그를 지난 11월 22일 서울시 중구 아시아평화를위한이주 사무국에서 만났다.
타이에서 운동하며 바랐던 것들은 무엇인가?
대학 2학년이던 2012년부터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내 주전공이 정치학이고 부전공이 역사학이다. 대학에서 대안적인 역사, 전세계 민중의 역사 등에 대해 배우면서 타이 역사를 들여다 봤을 때 왜 우리에게는 민중의 역사가 없는지 질문을 하게 됐다. 또 타이에는 한국보다 더 긴 시간인 80년 이상의 민주주의 제도가 있었는데 왜 이렇게 교착상태에 머물러 있고, 계속해서 쿠데타가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도 묻게 됐다. 타이에는 18번의 쿠데타가 있었고, 그 중 14번의 쿠데타가 성공했다. 전세계에서 세 번째로 쿠데타가 많은 나라가 타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 저항하고 일어나지 않는가? 대학 2학년 때 이런 온갖 종류의 질문들이 생겼고 많은 것들을 깨달아가면서 모든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왜 대학생이 교복을 입어야 하는지, 왜 왕실모독죄라는 것이 있는지. 왕실모독죄는 왕에 대한 명예훼손을 처벌하는 법이다. 왜 왕에게만 특별한 법이 있나? 왜 보통사람처럼 명예훼손법에 따라 처벌하지 않나? 내 첫 번째 학생운동은 대학생 교복에 반대하는 캠페인이었고, 두 번째는 왕실모독죄를 폐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2014년 쿠데타가 일어났고, 그 때부터는 일반적인 사회 문제에 대한 운동에서 쿠데타에 반대하는 운동으로 의제가 옮겨갔다.
타이 떠나오면서 했던 생각은?
사실 그 무엇도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군법재판소에서 소환 통지를 받은 날(2018년 1월 16일) 오후 2시 통지서에 기존에 진행 중이던 시위법 위반 혐의 등 재판 이외에 왕실모독죄라는 새로운 죄목이 써져 있는 것을 보고 바로 변호사와 동지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모두들 당장 타이를 떠나라고 했다. 인권 단체 인사 하나가 나에게 세 가지 선택지가 있다고 했다. 한국, 필리핀, 홍콩이었다. 모두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는 나라였고, 유엔난민기구(UNHCR) 사무국이 설치된 나라들이었다. 이 중 홍콩은 한 달 이상 혼자 살아남기에 물가가 너무 비쌌고, 필리핀은 두테르테 정부가 들어서서 너무 위험했다. 30분 만에 한국행을 결정하고 그 날 밤 11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2-3시간 정도 짐을 싸고 주변에 작별인사를 했다. 부모님은 이 상황에 대해 듣고 할 말을 잃었다. 한국으로 떠나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 5분간 정적이 흘렀지만 아버지는 변호사이기 때문에, 어머니는 매일 집에 찾아오는 군인들을 상대했기 때문에 지금 처한 것이 어떤 상황인지 바로 인지했다. 어머니 혼자 나를 공항까지 배웅했고, 어머니가 공항 감시카메라에 찍힐 것이 우려돼 우리는 차 안에서 작별인사를 했다. 이민국과 항공사 수속 카운터에서 의심을 살 수 있으니 공항에서 절대 울지 말라고 내 변호사와 지인들이 거듭 당부했다. 모든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타서 자리에 앉자마자 몇 시간 동안 울다가 잠깐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자마자 동지들이 챙겨준 한국 여행 일정을 무조건 외웠다. 한국에서 서류를 갖추지 못한 타이 이주자들이 많아서 타이 입국자에게 매우 엄격하기 때문에 대비해야 한다고 들었다. 여정에는 첫째 날은 경복궁에 가고 어떤 식당에서 어떤 메뉴의 음식을 먹을 건지 그런 내용이 빼곡했다. 처음 접한 단어, 낯선 언어를 외우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광주에서 정치 망명자로, 난민으로 살면서 어려운 점은 무엇이었나?
먼저 망명자에게 필요한 정보를 찾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이민국에도 자료가 없고, 이민국의 그 누구도 속 시원해 설명해주지 못했다. 만약 내가 이소아 변호사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난민 지위를 신청하는 방법도 몰랐을 것이다. 모든 망명자들은 외국인인데 왜 이민국 정보가 한국어로만 되어 있나? 이민국 서비스와 전체 시스템이 모두 나빴다. 그 다음으로 어려웠던 부분은 언어였다. 매일 의사소통하는 것이 아주아주 큰 문제였다. 나는 K-pop이나 한국 드라마 팬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국에 대해 많이 알지 못했다. 감사 표현이나 이름을 묻는 질문도 한국어로 할 줄 모르는 상황에서 한국으로 왔다. 광주에서 보낸 첫 5일간 매일 GS25 편의점에 가서 핫도그 같은 것을 사서 끼니를 채웠다.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공항에서 나를 픽업해준 한국 남성이 소개한 광주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었지만 주인에게는 내가 난민이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신변의 안전 우려도 있고, 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첫 5일간은 되도록 낯선 이들과의 긴 대화를 피했다.
정치적 망명자, 난민, 여성으로서 본 한국 사회는 어떤가?
나와 같은 망명자, 난민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한국에서 환대받지 못한다고 느끼고, 외국인 중에서도 가장 등급이 낮다고 느낀다. 사람들은 백인에 영어교사인 외국인을 대할 때 가장 친절하게 대하고, 다음으로 이곳에서 공부하는 외국인 학생들, 다음으로 이주 노동자 그리고 마지막이 난민인 순서로 외국인을 대하는 것이 차등적이다. 난민이라고 나를 소개할 때 사람들은 표정에서부터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사람들이 하는 질문 중에 '왜 다른 나라로 가지 않고 한국으로 왔냐?'는 질문을 싫어한다. 광주에 살 때 몸이 아파서 전남대학교 근처 의원에 갔는데 의사의 영어가 유창했다. 그는 ‘한국에도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다, 아직 북한과 전쟁 중이고, 경제 위기 때문에 실업자도 많아서 난민을 받을 형편이 못 된다. 왜 미국으로 가지 않았냐’고 물었다. 이런 질문에 대해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미국으로 갈 수 없고, 이곳에서는 나를 환영하지 않으니 당신과는 더이상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타이에서도 시리아 난민이나 로힝쟈 난민을 만나면 사람들은 언제 자기 나라로 돌아갈 거냐는 식의 질문을 한다. 돌아갈 수 없는데 왜 그런 질문을 하는가. 나도 이곳에서 그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 돌아갈 거니? 언제 돌아갈 거니? 왜 유럽으로 가지 않았니? 난민에게는 선택지가 없다. 난민 문제에 관심이 없거나 무지하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으로 한국 사회에 사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타이가 여성인권운동에 있어 최고의 나라는 아니지만 적어도 남성과 여성 사이의 위계 문제에 있어서는 한국보다 낫다고 본다. 일터나 학교, 가정 내에서도 나는 타이에서 여성으로서 더 안전하다고 느꼈다. 내가 친구들에게 자주 하는 말인데 한국에서는 지갑을 놓고 자리를 떠나도 도난당할 걱정을 하지 않지만, 남자가 와서 성적으로 추행을 하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외면할까봐 걱정된다고 말한다. 이런 것들이 아직도 생경하다. 광주에서 경험한 성추행에 대해 말하면 많은 여성들이 공감하면서 자신들의 경험도 공유했다. 내가 만난 95퍼센트의 한국 여성들이 비슷한 종류의 경험, 남성에 의한 성폭력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한국은 여성에게 안전한 나라가 아니다. 광주에 처음 살 때 타이 여자친구가 나와 잠시 함께 살았다. 광주에 있는 단체 사람들이나 변호사 등 사회운동 진영의 사람들을 만날 때 그녀와 같이 나갔는데 내가 커플인 여자친구라고 그들에게 소개하면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들은 남자와 남자 커플은 좀 봤어도 여자와 여자 커플은 한국에서 본 적이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하지만 한국에 있는 동안 약 5만 명의 사람들이 퀴어문화축제에 참여한 것을 봤다. 그 중 절반 이상이 레즈비언이고 게이고 그렇다. 어디에나 있는 사람들을 모른다는 것이다. 한국에 오기 전부터 한국 사람들이 LGBT 커뮤니티에 대해 매우 보수적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직접 와서 경험해 보니 더 강하게 느꼈다. 광주 이민국에서 나의 난민 지위와 관련해 인터뷰를 할 때도 내가 여자친구와 함께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통역 담당자가 여자친구라는 말을 통역하지 않고 전달하기에 바로잡은 적이 있다. 친구가 아니라 여자친구라고 아주 여러 번 설명하고 또 설명했다. 내 여자친구라고 말하는데 상대가 계속 친구라고 말한다는 것은 우리가 커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거부한 것이다. 아마 내 성적 지향을 반대하거나, 혐오하거나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왜 광주를 떠났는지?
처음에는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아주 큰 희망이 있었다. 그리고 사람이 살기에 매우 좋은 환경일 것으로 기대했다. 광주의 사람들에게는 광주 정신이 살아 있고, 그들은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에게 일어났던 한 사건 때문에 광주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희망과 신뢰가 부서졌다. 민주화 운동 단체의 인턴 하나가 나를 성적으로 추행했다. 나는 곧바로 이 문제에 대해 단체 이사회에 문제를 제기했지만 이사회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성추행이 일터 밖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단체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성추행에 대한 그 어떤 내부 규정도 없다고도 설명했는데 이 사실이 정말 놀라웠다. 그들의 태도 자체도 충격이었지만 문제와 관련된 규정이 없다는 사실도 그랬다. 그 후 나는 나에 대한 성추행 사건에 대해 이 단체가 대처한 방식으로 인해 민주화 운동에 대한 모든 신뢰를 잃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공적으로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달랐다. 그들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알리면서도 인권을 침해하고, 여성운동을 원점으로 역행시켰다. 여성들이 지난 수십년 동안 투쟁해 여기까지 왔는데 이 단체로 인해 우리가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에 대해 실망했고 그래서 광주를 떠났다.
현재 하는 일은 무엇인가?
아시아평화를향한이주에서 난민, 비자발적 이주민들을 위한 지지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작년에 예멘 난민이 제주도로 많이 입국해 지금도 많은 예멘 난민들이 도움을 받기 위해 이곳을 찾고 있는데 이들 돕고 있다. 그전에는 미얀마 난민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활동이 많았다. 한국에서 가장 큰 난민 인구가 미얀마에서 온 카친, 친, 카렌 등 소수종족 사람들이다. 기본적으로는 그들에게 한국 정부가 제공해야 하지만 못하고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아랍어, 영어, 프랑스어 등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한다. 사람책도서관이라는 프로그램에도 참여하고 있다. 사람책은 한국에서 거주하는 난민 8-10명을 초청해 책이 되어 그들이 경험한 각기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업이다. 나의 이야기, 예멘, 이집트, 콩고 친구의 이야기가 사람책이 되었다. 이 책을 읽는 독자 그러니까 청중은 대부분 학생들이다. 지난 6월 20일에 시작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내가 맡은 또 다른 일은 난민을 위해 활동하는 국제기구와 연락하고 교류하는 것이다.
경계인으로서 세계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경계인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갖춰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소수자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난민에 대해 여성에 대해 소수자에 대해 소수종족에 대해 깊이 이해한다면, 그들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말은 하면 소수자에게 상처가 되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이해가 있다면 차별은 없을 것이다. 사실 경계는 매우 정치적인 것이다. 대학에서 경계는 실재가 아니라고 배웠다. 그것은 정부가 만들어낸 상상의 산물일 뿐 사람들 사이에는 원래 경계가 없다. 경계 이쪽에서는 사람이고 경계 너머 저쪽에서는 덜 사람이고 그런 게 아니지 않는가. 우리가 아는 경계와 국경, 선들은 모두 상상의 선이지 진짜가 아니다. 민족 국가는 정부에 의해 창조된 것이고 사람들이 나와 같은 땅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면 나와 동등한 권리를 갖지 못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 땅에서 태어나 다수에 속해 있을지라도 국경을 넘어가면 당신은 소수자가 된다. 경계와 국경을 넘는 순간 당신은 남의 땅에 들어선 외국인, 소수자, 외계인이 된다.
타이에서 운동하며 바랐던 것들은 무엇인가?
대학 2학년이던 2012년부터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내 주전공이 정치학이고 부전공이 역사학이다. 대학에서 대안적인 역사, 전세계 민중의 역사 등에 대해 배우면서 타이 역사를 들여다 봤을 때 왜 우리에게는 민중의 역사가 없는지 질문을 하게 됐다. 또 타이에는 한국보다 더 긴 시간인 80년 이상의 민주주의 제도가 있었는데 왜 이렇게 교착상태에 머물러 있고, 계속해서 쿠데타가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도 묻게 됐다. 타이에는 18번의 쿠데타가 있었고, 그 중 14번의 쿠데타가 성공했다. 전세계에서 세 번째로 쿠데타가 많은 나라가 타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 저항하고 일어나지 않는가? 대학 2학년 때 이런 온갖 종류의 질문들이 생겼고 많은 것들을 깨달아가면서 모든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왜 대학생이 교복을 입어야 하는지, 왜 왕실모독죄라는 것이 있는지. 왕실모독죄는 왕에 대한 명예훼손을 처벌하는 법이다. 왜 왕에게만 특별한 법이 있나? 왜 보통사람처럼 명예훼손법에 따라 처벌하지 않나? 내 첫 번째 학생운동은 대학생 교복에 반대하는 캠페인이었고, 두 번째는 왕실모독죄를 폐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2014년 쿠데타가 일어났고, 그 때부터는 일반적인 사회 문제에 대한 운동에서 쿠데타에 반대하는 운동으로 의제가 옮겨갔다.
타이 떠나오면서 했던 생각은?
사실 그 무엇도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군법재판소에서 소환 통지를 받은 날(2018년 1월 16일) 오후 2시 통지서에 기존에 진행 중이던 시위법 위반 혐의 등 재판 이외에 왕실모독죄라는 새로운 죄목이 써져 있는 것을 보고 바로 변호사와 동지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모두들 당장 타이를 떠나라고 했다. 인권 단체 인사 하나가 나에게 세 가지 선택지가 있다고 했다. 한국, 필리핀, 홍콩이었다. 모두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는 나라였고, 유엔난민기구(UNHCR) 사무국이 설치된 나라들이었다. 이 중 홍콩은 한 달 이상 혼자 살아남기에 물가가 너무 비쌌고, 필리핀은 두테르테 정부가 들어서서 너무 위험했다. 30분 만에 한국행을 결정하고 그 날 밤 11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2-3시간 정도 짐을 싸고 주변에 작별인사를 했다. 부모님은 이 상황에 대해 듣고 할 말을 잃었다. 한국으로 떠나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 5분간 정적이 흘렀지만 아버지는 변호사이기 때문에, 어머니는 매일 집에 찾아오는 군인들을 상대했기 때문에 지금 처한 것이 어떤 상황인지 바로 인지했다. 어머니 혼자 나를 공항까지 배웅했고, 어머니가 공항 감시카메라에 찍힐 것이 우려돼 우리는 차 안에서 작별인사를 했다. 이민국과 항공사 수속 카운터에서 의심을 살 수 있으니 공항에서 절대 울지 말라고 내 변호사와 지인들이 거듭 당부했다. 모든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타서 자리에 앉자마자 몇 시간 동안 울다가 잠깐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자마자 동지들이 챙겨준 한국 여행 일정을 무조건 외웠다. 한국에서 서류를 갖추지 못한 타이 이주자들이 많아서 타이 입국자에게 매우 엄격하기 때문에 대비해야 한다고 들었다. 여정에는 첫째 날은 경복궁에 가고 어떤 식당에서 어떤 메뉴의 음식을 먹을 건지 그런 내용이 빼곡했다. 처음 접한 단어, 낯선 언어를 외우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광주에서 정치 망명자로, 난민으로 살면서 어려운 점은 무엇이었나?
먼저 망명자에게 필요한 정보를 찾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이민국에도 자료가 없고, 이민국의 그 누구도 속 시원해 설명해주지 못했다. 만약 내가 이소아 변호사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난민 지위를 신청하는 방법도 몰랐을 것이다. 모든 망명자들은 외국인인데 왜 이민국 정보가 한국어로만 되어 있나? 이민국 서비스와 전체 시스템이 모두 나빴다. 그 다음으로 어려웠던 부분은 언어였다. 매일 의사소통하는 것이 아주아주 큰 문제였다. 나는 K-pop이나 한국 드라마 팬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국에 대해 많이 알지 못했다. 감사 표현이나 이름을 묻는 질문도 한국어로 할 줄 모르는 상황에서 한국으로 왔다. 광주에서 보낸 첫 5일간 매일 GS25 편의점에 가서 핫도그 같은 것을 사서 끼니를 채웠다.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공항에서 나를 픽업해준 한국 남성이 소개한 광주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었지만 주인에게는 내가 난민이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신변의 안전 우려도 있고, 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첫 5일간은 되도록 낯선 이들과의 긴 대화를 피했다.
정치적 망명자, 난민, 여성으로서 본 한국 사회는 어떤가?
나와 같은 망명자, 난민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한국에서 환대받지 못한다고 느끼고, 외국인 중에서도 가장 등급이 낮다고 느낀다. 사람들은 백인에 영어교사인 외국인을 대할 때 가장 친절하게 대하고, 다음으로 이곳에서 공부하는 외국인 학생들, 다음으로 이주 노동자 그리고 마지막이 난민인 순서로 외국인을 대하는 것이 차등적이다. 난민이라고 나를 소개할 때 사람들은 표정에서부터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사람들이 하는 질문 중에 '왜 다른 나라로 가지 않고 한국으로 왔냐?'는 질문을 싫어한다. 광주에 살 때 몸이 아파서 전남대학교 근처 의원에 갔는데 의사의 영어가 유창했다. 그는 ‘한국에도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다, 아직 북한과 전쟁 중이고, 경제 위기 때문에 실업자도 많아서 난민을 받을 형편이 못 된다. 왜 미국으로 가지 않았냐’고 물었다. 이런 질문에 대해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미국으로 갈 수 없고, 이곳에서는 나를 환영하지 않으니 당신과는 더이상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타이에서도 시리아 난민이나 로힝쟈 난민을 만나면 사람들은 언제 자기 나라로 돌아갈 거냐는 식의 질문을 한다. 돌아갈 수 없는데 왜 그런 질문을 하는가. 나도 이곳에서 그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 돌아갈 거니? 언제 돌아갈 거니? 왜 유럽으로 가지 않았니? 난민에게는 선택지가 없다. 난민 문제에 관심이 없거나 무지하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으로 한국 사회에 사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타이가 여성인권운동에 있어 최고의 나라는 아니지만 적어도 남성과 여성 사이의 위계 문제에 있어서는 한국보다 낫다고 본다. 일터나 학교, 가정 내에서도 나는 타이에서 여성으로서 더 안전하다고 느꼈다. 내가 친구들에게 자주 하는 말인데 한국에서는 지갑을 놓고 자리를 떠나도 도난당할 걱정을 하지 않지만, 남자가 와서 성적으로 추행을 하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외면할까봐 걱정된다고 말한다. 이런 것들이 아직도 생경하다. 광주에서 경험한 성추행에 대해 말하면 많은 여성들이 공감하면서 자신들의 경험도 공유했다. 내가 만난 95퍼센트의 한국 여성들이 비슷한 종류의 경험, 남성에 의한 성폭력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한국은 여성에게 안전한 나라가 아니다. 광주에 처음 살 때 타이 여자친구가 나와 잠시 함께 살았다. 광주에 있는 단체 사람들이나 변호사 등 사회운동 진영의 사람들을 만날 때 그녀와 같이 나갔는데 내가 커플인 여자친구라고 그들에게 소개하면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들은 남자와 남자 커플은 좀 봤어도 여자와 여자 커플은 한국에서 본 적이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하지만 한국에 있는 동안 약 5만 명의 사람들이 퀴어문화축제에 참여한 것을 봤다. 그 중 절반 이상이 레즈비언이고 게이고 그렇다. 어디에나 있는 사람들을 모른다는 것이다. 한국에 오기 전부터 한국 사람들이 LGBT 커뮤니티에 대해 매우 보수적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직접 와서 경험해 보니 더 강하게 느꼈다. 광주 이민국에서 나의 난민 지위와 관련해 인터뷰를 할 때도 내가 여자친구와 함께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통역 담당자가 여자친구라는 말을 통역하지 않고 전달하기에 바로잡은 적이 있다. 친구가 아니라 여자친구라고 아주 여러 번 설명하고 또 설명했다. 내 여자친구라고 말하는데 상대가 계속 친구라고 말한다는 것은 우리가 커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거부한 것이다. 아마 내 성적 지향을 반대하거나, 혐오하거나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왜 광주를 떠났는지?
처음에는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아주 큰 희망이 있었다. 그리고 사람이 살기에 매우 좋은 환경일 것으로 기대했다. 광주의 사람들에게는 광주 정신이 살아 있고, 그들은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에게 일어났던 한 사건 때문에 광주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희망과 신뢰가 부서졌다. 민주화 운동 단체의 인턴 하나가 나를 성적으로 추행했다. 나는 곧바로 이 문제에 대해 단체 이사회에 문제를 제기했지만 이사회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성추행이 일터 밖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단체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성추행에 대한 그 어떤 내부 규정도 없다고도 설명했는데 이 사실이 정말 놀라웠다. 그들의 태도 자체도 충격이었지만 문제와 관련된 규정이 없다는 사실도 그랬다. 그 후 나는 나에 대한 성추행 사건에 대해 이 단체가 대처한 방식으로 인해 민주화 운동에 대한 모든 신뢰를 잃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공적으로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달랐다. 그들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알리면서도 인권을 침해하고, 여성운동을 원점으로 역행시켰다. 여성들이 지난 수십년 동안 투쟁해 여기까지 왔는데 이 단체로 인해 우리가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에 대해 실망했고 그래서 광주를 떠났다.
현재 하는 일은 무엇인가?
아시아평화를향한이주에서 난민, 비자발적 이주민들을 위한 지지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작년에 예멘 난민이 제주도로 많이 입국해 지금도 많은 예멘 난민들이 도움을 받기 위해 이곳을 찾고 있는데 이들 돕고 있다. 그전에는 미얀마 난민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활동이 많았다. 한국에서 가장 큰 난민 인구가 미얀마에서 온 카친, 친, 카렌 등 소수종족 사람들이다. 기본적으로는 그들에게 한국 정부가 제공해야 하지만 못하고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아랍어, 영어, 프랑스어 등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한다. 사람책도서관이라는 프로그램에도 참여하고 있다. 사람책은 한국에서 거주하는 난민 8-10명을 초청해 책이 되어 그들이 경험한 각기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업이다. 나의 이야기, 예멘, 이집트, 콩고 친구의 이야기가 사람책이 되었다. 이 책을 읽는 독자 그러니까 청중은 대부분 학생들이다. 지난 6월 20일에 시작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내가 맡은 또 다른 일은 난민을 위해 활동하는 국제기구와 연락하고 교류하는 것이다.
경계인으로서 세계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경계인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갖춰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소수자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난민에 대해 여성에 대해 소수자에 대해 소수종족에 대해 깊이 이해한다면, 그들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말은 하면 소수자에게 상처가 되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이해가 있다면 차별은 없을 것이다. 사실 경계는 매우 정치적인 것이다. 대학에서 경계는 실재가 아니라고 배웠다. 그것은 정부가 만들어낸 상상의 산물일 뿐 사람들 사이에는 원래 경계가 없다. 경계 이쪽에서는 사람이고 경계 너머 저쪽에서는 덜 사람이고 그런 게 아니지 않는가. 우리가 아는 경계와 국경, 선들은 모두 상상의 선이지 진짜가 아니다. 민족 국가는 정부에 의해 창조된 것이고 사람들이 나와 같은 땅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면 나와 동등한 권리를 갖지 못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 땅에서 태어나 다수에 속해 있을지라도 국경을 넘어가면 당신은 소수자가 된다. 경계와 국경을 넘는 순간 당신은 남의 땅에 들어선 외국인, 소수자, 외계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