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코위의 탄생
아시아저널(No.9), Dec 23, 2014 (자카르타)
아시아저널(No.9), Dec 23, 2014 (자카르타)
2012년 8월25일, 소셜미디어 트위터에서 작은 시국토론이 열렸다.
"2년 후에, 인도네시아는 대통령을 선택한다. 군 출신은 이제 그만.." 인도네시아 시사주간 <뗌뽀(Tempo)> 기자 아흐마드 타우픽(Ahmad Taufik)이 남긴 이 말 때문이다.
"그러게요. 근데 군 출신 아닌 대통령감이 누가 있나?"
"조코위 밖에 없죠."
다음 대통령을 뽑는 선거는 2014년 7월9일로 아직 2년이 남은 상태였지만 대화는 내일 당장 대선이 있을 것처럼 긴박하고 진지했다. 사실 이렇게 차기 대통령을 점치고 논하는 대화는 자카르타의 오프라인의 일상에서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2012년에 들어서면서 인도네시아인이건, 자카르타에 사는 한국인을 포함한 외국인이건 세 명 이상이 모이면 식사 후 커피와 함께 '다음 대통령은 누구인가'를 주제로 토론을 벌이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때 자주 등장한 이름이 프라보워 수비안토(Prabowo Subianto) 전 특수부대 사령관, 메가와티 수카르노 푸트리(Megawati Sukarno Putri) 전 대통령, 아부리잘 바크리(Aburizal Bakri) 골카르당 대표, 하타 라자사(Hatta Rajasa) 경제조정장관, 혹은 당시 대통령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Susilo Bambang Yudhoyono, 이하 SBY)의 부인 아니 유도요노(Ani Yudhoyono)였다.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의 딸 메가와티부터 수하르토의 사위 프라보워에 이어 수하르토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골카르당 대표 아부리잘과 SBY 정부의 간판격인 하타와 아니까지 기존 정계 계보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이름들이다. 여기에 조코위(조코 위도도 Joko Widodo의 별칭)가 2012년 7월 자카르타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면서 전국적 인지도를 쌓으며 새로운 얼굴로 차기 대권 명단에 추가됐다.
시민들이 'D-day'를 계산하며 다음 대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 새로 등장할 인물에 열광하고 있다는 것은 현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싫증이 쌓일 대로 쌓였다는 의미로 풀이됐다. 실제로 기자가 자카르타에 처음 도착한 2011년 9월부터 1년간 접한 거리 시위대의 단골구호가 'SBY는 하야하라'였다. 거리에 나온 사람들은 유가인상 반대, 사법기구의 불공정한 법 집행 규탄, 최저임금 인상 촉구 등 집회의 내용을 막론하고 대통령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 팔짱 끼고 시위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만만한 게 대통령'인 시국에 혀를 찼다.
인도네시아 최초의 민선대통령으로 재임까지 성공한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정부가 재임 중반부터 맞닥뜨린 이 격렬한 민심 이반의 원인은 개혁과 부패척결, 경제성장 분배에서 모두 실패해서다. 이 세가지 과제는 SBY가 재임 선거 운동과정에서 핵심 공약으로 내세운 것들이다. 그러나 SBY 정부는 집권 2기 첫해부터 각종 부패비리 사건으로 시끄러웠다. 가장 대표적인 두 사건이 2009년 불거진 센추리은행 구제금융 비리와 2011년 드러난 동남아시아게임 함발랑 선수촌 건설 비리다. 센추리은행 비리의 경우 SBY 정부의 두 부통령 유수프 칼라(Jusuf Kalla)와 부디오노(Boediono)가 핵심으로 지목됐고, 함발랑 선수촌 건설 비리는 차기 민주당 대표로 불리며 SBY의 신망을 받던 청소년스포츠부 장관 안디 말라랑엥(Andi Malalangeng)과 당시 민주당 대표 아나스 어르바닝룸(Anas Urbaningrum)의 연루 혐의가 밝혀지면서, SBY 정부와 집권 민주당이 부패척결에 실패했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함발랑 스캔들과 관련해서는 SBY의 아들 에디 바스코로 유도요노(Edhie Baskoro Yudhoyono) 현 민주당 대표의 연루 의혹도 끊이지 않고 있다.
1998년 민주화 이후 탄생한 최초의 직선 대통령에 대한 시민사회의 또 다른 기대는 수하르토 독재 잔재의 청산이었다. 하지만 이 기대 역시 SBY 첫 집권 2년차인 2006년부터 일찌감치 실망으로 돌아섰다. 수하르토 독재 잔재의 청산이란 32년 집권 기간에 자행된 조직적이고 광범한 국가폭력 책임자들을 법정에 세우는 것과, 수하르토 일가와 측근의 천문학적 부정축재를 추궁해 밝히는 일이다. '인도네시아 법률지원재단(YLBHI)'과 '인도네시아 실종자 및 폭력 피해자 위원회(KontraS)' 등 주요 시민사회단체는 '대어'는 비껴가고 자잘한 부패 스캔들 조사에만 칼을 대는 SBY의 비겁함을 2006년부터 줄기차게 꼬집었다. 여기에 매년 평균 7%를 웃도는 경제성장의 열매가 외국계 투자자와 기업에게만 돌아간다는 시민들의 불만까지 겹치면서 SBY와 민주당의 인기는 완전히 식어갔고, 새로운 인물에 대한 열망을 커져갔다.
조코위의 등장. 에셈카와 블루수칸 열풍
2014년 10월 20일 취임한 인도네시아 7대 대통령 조코위는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등장했다. 조코위가 자신의 이름으로 전국적 주목을 받은 것은 2012년 1월 3일의 일이다. 당시 중부 자바 주 솔로(수라카르타의 약칭)시의 시장이던 조코위는 국립 솔로제2실업고등학교(SMKN2) 학생들이 자체 개발한 스포츠 실용차(SUV)인 에셈카(ESEMKA)를 솔로 시장의 관용차로 사용한다고 발표했다. 대대적인 언론 보도와 함께 인도네시아 국산차 생산에 대한 자부심과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반감이 동시에 일어났다. 조코위는 '정치적 이미지 메이킹'이라는 비난에 대해 '솔로 시장 재임 7년간 내 얼굴 사진 한 번 내건 적 없는데 이미지 메이킹 운운하지 말라. 국산품에 대한 자신감을 널리 알리고 고취시키고 싶었을 뿐이다."며 반박하는 한편 자신이 직접 나서서 독일 자동차 회사로부터 에셈카개발 투자와 기술 지원도 받아내면서 상용화에 매달렸다. 산업계와 정치계, 시민과 대통령이 한 목소리로 에셈카를 '인도네시아의 자동차'로 만들어야 한다고 호응했다. 에셈카와 함께 한 조코위의 등장은 일찌감치 대선에 대한 기대를 접은 시민들에게는 희망의 실마리가 됐다. 인도네시아 일간 <코란 뗌뽀(Koran Tempo)> 정치부 기자 안톤 윌리엄은 "대부분의 기자들 사이에 에셈카 관용화 발표 때부터 조코위가 대선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데 이견이 없다. 그는 무엇이 유권자에게 통하는지 아는 영리한 정치인이다."고 말했다.
2012년 4월, 조코위는 솔로 시장 임기를 2년 남겨두고 자카르타 주지사 선거에 출사표를 던졌다. 연임 가능성이 높았던 파우지 보워(Fauzi Bowo) 자카르타 주지사를 견제하기 위해 대항마를 찾던 공공주택부 장관 쟌 파리즈(Djan Faridz)와 유수프 칼라 전 부통령의 천거였다. 조코위는 이들을 통해 투쟁민주당(PDI-P) 대표 메가와티와 투쟁민주당의 실세인 메가와티의 남편 타우픽 키에마스(Taufik Kiemas) 국민협의회(MPR) 의장을 만났다. 유수프 칼라는 "조코위는 솔로에서 성공적이었다. 전국 무대에 도전할 만한 자격을 갖춘 인물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다른 말로 조코위와 에셈카 열풍이 자카르타 주지사 선거에서도 충분히 쓸 만한 카드라는 뜻이다. 조코위는 칼라 전 부통령과 투쟁민주당 대표 메가와티, 그린드라(Gerindra)당 대표 프라보워의 구상대로 남부 수마트라 주 동벌리퉁(East Bangka Belitung) 군수 출신 바수키 자하야 푸르나마(Basuki Tjahaja Purnama, 일명 아혹)와 짝을 이뤄 2012년 7월과 9월의 2차 투표를 거쳐 자카르타 주지사에 당선됐다.
조코위가 자카르타 주지사 선거운동 과정과 주지사 취임 후 선보인 '블루수칸(Blusukan)'은 많은 시민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블루수칸은 인도네시아 자바 지역에서 쓰이는 속어로 '즉흥적인 방문'을 뜻한다. 조코위는 자주색 체크무늬 셔츠나 흰색 셔츠를 입고 참모 한두 명과 사전계획이나 예고 없이 빈민촌, 보건소, 시장, 홍수 현장 등을 방문하며 유권자, 시민, 기자들과 만났는데, 인도네시아 시민들이 보기에 중요한 의사결정권을 가진 정치인이 자기 동네까지 찾아와 말을 걸고 온갖 불만사항을 들어주는 경험은 전에 없던 것이었다. 블루수칸은 성공한 가구 수출업자 조코위가 처음 정계에 진출한 2005년 솔로 시장 선거 당시 붙여진 선거운동 명칭이기도 하다. 정치적으로 무명에 가까운 조코위가 전단과 대형 광고판 홍보 대신 오토바이를 타고 직접 시민들을 찾아다니는 방식으로 선거운동을 한 데서 착안했다. 솔로 시장 선거캠프 공보담당자였던 앙깃(Anggit)은 "지역 기자들이 선거운동 모델이 뭐냐고 묻기에 즉흥적으로 '블루수칸'이라고 답했다. 나중에 더 적절한 명칭을 붙이려고 했지만 그대로 조코위의 정치적 캐릭터가 되었다"고 말했다.
2005년 솔로에서 시작해 2012년 자카르타를 거친 조코위 열풍은 식지 않고 그대로 2014년 대선까지 이어졌다. 조코위 열풍이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은 저력은 그가 현장을 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행정경험을 쌓아왔기 때문이다. 조코위의 이런 이력을 시사주간 <뗌뽀(Tempo)>의 연말특집호 '2008 베스트 지방자치단체장 10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뗌뽀>는 각종 부정부패로 얼룩진 지방자치제 10주년을 앞두고, 더 나은 인도네시아를 꿈꿀 수 있는 희망을 보여주는 시장, 군수를 꼽았다. 이 특집호에서 솔로 시장 조코위의 인본적 리더십이 조명 받았다. 조코위가 솔로 시에서 주력한 것은 도시 노점 재배치와 전통시장 부활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노점상인과 시장상인의 목소리를 중심에 두고 지역의원 등을 만나 시 예산 집행을 설득하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1985년 중부 자바 족자카르타의 가자마다대학(UGM) 임학과를 졸업한 뒤 가구수출업자로 성공한 조코위가 20년 사업경력 중에 익힌 문제해결 방식을 솔로의 시정에서도 활용한 것이다.
자카르타 주지사가 된 후에는 자신의 주력 공약이었던 자카르타 보건카드(KJS), 홍수 대책, 모노레일 건설, 서민주택 건설 등을 막힘없이 추진해갔다. 조코위는 현장으로 달려가고, 부주지사 아혹은 관료들에게 쓴 소리를 해가며 모든 시정할동을 유튜브(Youtube)와 홈페이지 등을 통해 공개했다. 언론과 시민이 열광했다. 조코위와 아혹은 대변인 없이 시민, 기자들과 만나 현안에 대해 직접 소통했다. 이 때의 여론은 이미 조코위가 인도네시아 대통령인 것으로 착각할 만큼 기울어 있었다. 빈민촌, 홍수 지역, 교통체증 지역, 보건소 등에 대한 조코위의 블루수칸이 연일 신문 헤드라인이 됐고, 유도요노 대통령의 존재감은 잊혀지기 시작했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에 이런 분위기가 그대로 반영됐다. 2013년 2월 실시된 2014년 대선 후보 지지율 조사에서 조코위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했는데, 그 뒤 그가 대권 명단에 포함된 조사에서는 내내 지지율 1위를 달렸다. 2013년 10월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여론조사기관 로이모건(Roy Morgan)의 조사 결과 조코위 지지율이 37%에 육박했다. 조코위를 자카르타 주지사로 내세웠던 메가와티와 프라보워, 칼라 등 정계 거물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2014년 총선과 대선을 향한 분위기 반전용으로 꺼낸 '조코위 카드'가 결과적으로 당과 정계 거물들의 존재감을 압도해 버렸기 때문이다. 두 번째 대권을 노린 메가와티와, '이제는 내 차례'라고 생각했던 강력한 대선 후보 그린드라당 대표 프라보워의 위기감이 특히 도드라졌다. 언론은 메가와티를 차기 대권 주자 대신 조코위의 '킹 메이커'로 주목했고, 프라보워는 조코위가 자카르타 주지사의 5년 임기를 마칠 의무가 있다는 말을 반복하며 조코위 대권론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조코위는 '언제 대선에 출마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지겹다'는 반응으로 일관하며 자카르타 블루수칸을 이어갔다. 조코위는 메가와티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 조코위가 '메가와티의 인형'이라는 말이 뒤따랐다.
대선 레이스-조코위 효과, 신구 선악의 전통적 대결 구도
2014년 인도네시아 대선 열기는 2013년 11월께부터 달궈졌다. 선거관리위원회(KPU) 일정에 따라 2014년 7월로 예정되어 있었으니 인도네시아가 10개월간 뜨거웠던 셈이다. 24시간 뉴스채널 메트로(Metro) TV는 화면 한편에 대선 D-day를 표시하기 시작했고, 각 언론사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도 '2014 대선' 전용 섹션이 등장했다. 주인공인 시민들은 좀 시큰둥했다. 후보로 오르내리는 이름들이 정계 구면들이었고, 지금껏 대통령을 뽑는 과정이 유권자의 의사보다는 정당들 간의 합종연횡에 따라 누구도 결과를 알 수 없는 안개 속이었던 경험, 거기에 직접선거로 뽑은 유도요노 대통령도, 새 시대에 대한 환희 속에 출발한 구스둘(Gus Dur, 압두라만 와히드 4대 대통령의 별칭)도 그 끝이 부패였던 기억이 생생했기 때문이다.
"조코위가 나오면 또 모르지, 투표하려 갈지." 중부 자바주 스마랑(Semarang) 출신 택시기사 헨드로 물리요노(30)는 대선 1년 전부터 조코위를 기다리고 있었다. 헨드로를 포함해 나날의 생계에 매달리는 많은 인도네시아 시민들에게는 투표소까지 발을 떼게 만들 희망이 필요했다. 헨드로는 "구스둘이 탄핵된 뒤 있었던 대선에서 아민 라이스(Amien Rais, 인도네시아 국민수권당을 이끄는 개혁파 인사-편집자 주)에게 던진 표가 마지막이었다. 이제는 아민이 출마한다 해도 투표하러 가지 않을 거다. 우리에게는 투표장으로 이끌어줄 신나는 후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2013년 말, 인도네시아 '당둣(Dangdut, 인도.아랍.말레이계 혼성의 전통 대중음악)왕'이라는별명이 붙은 가수 로마 이라마(Roma Irama)가 국민각성당(PKB) 대선 후보로 영입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로마는 1997년부터 골카르당의 '표잡이(pendulang suara)'로 주요 선거 유세현장에서 유권자를 끌어 모으는 역할을 했다. 당둣은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연령과 지역을 아우르며 유행해 온 가요 장르로, 로마는 당둣의 이런 대중적 인기를 만들어낸 대표적 가수다. 곧 시민들로부터 '로마가 대통령 선거 출마하면 나도 한다', '국민각성당하면 구스둘을 떠올렸는데 로마라니, 갈 데까지 갔다'는 조롱 섞인 비난이 쏟아졌고 대선 정국은 한바탕 촌극처럼 흘러갔다. 대선 출마 의사를 내보인 적도 없는 조코위가 대선 정국을 완전히 주도했고, 각 정당은 틈새를 노리며 연예인들을 국회의원 후보로 영입하기 시작했다. 선거법상 각 정당이 대선행 티켓을 쥐려면 대선 후보 등록 요건인 총선 득표율 25% 혹은 의석 점유율 20%를 채워야 하는데, 여기서 연예인과 유명인을 동원해 정당의 이름을 각인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뚜렷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대선보다는 일단 2014년 4월 9일로 예정된 총선부터 챙기자는 분위기였다.
총선 챙기기가 유독 심했던 당이 바로 지난 10년간 야당이었던 메가와티의 투쟁민주당이다. 조코위 지지율이 2012년 12월부터 꾸준한 상승세를 보이자 인도네시아 언론을 통해 조코위가 투쟁민주당 대선 후보로 결정되면 투쟁민주당의 총선 득표율이 30-35%까지 치솟을 거라며 소위 '조코위 효과'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정당 득표율이 25%를 넘으면 다른 정당과의 연합 없이 단독으로 대선 후보를 낼 수 있게 되는데, 대선 열기가 시작된 2013년 12월 지지율이 20% 수준에 머물러 더 이상 오르지 않던 투쟁민주당에게 조코위 효과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만약 메가와티가 이런 대세를 거스르고 스스로 세 번째 대권 도전에 나서거나 조코위를 부통령 후보로도 내지 않는다면 유권자들이 투쟁민주당에 등을 돌릴 거라는 분석 기사들도 나왔다.
메가와티는 결국 총선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되기 이틀 전인 3월 14일 조코위를 투쟁민주당 대선 후보로 지명한다고 발표했다. 투쟁민주당 선거승리위원장인 푸안 마하라니(Puan Maharani)가 자카르타 남부 렌텡 아궁(Lenteng Agung) 중앙당사에서 어머니 메가외티가 작성한 조코위의 대선 후보 지명 선언서를 읽었다. "비스밀라히라흐만이라힘(Bismilahirrahmanirrahim, 알라의 이름으로 위대함과 영광이 있으라는 뜻으로 무슬림들이 중요한 일이나 의식을 앞두고 하는 기도의 말), 저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같은 시각, 조코위 자카르타 주지사는 저항을 상장한다는 자카르타 북부 마룬다(Marunda)의 버따위(Betawi)족 출신 독립투쟁영웅 '시 피뚱(Si Pitung)'을 기리는 집에서 지명을 수락하고 흰색과 빨간색의 인도네시아 국기 '메라푸티(Mera-Putih)'에 입을 맞췄다.
2014년 4월 9일, 인도네시아 전국 34개 주 7,000여개 섬에서 약 1억 8590명의 유권자가 560석의 국민대표회의(DPR), 132석의 지역대표회의(DPD), 2112석의 주지방의회(DPR Provinsi)와 1만 6895석의 군지방의회(DPRD Kabupaten) 의원을 뽑았다. 조코위 효과를 기대하며 27.02%의 득표를 목표로 총선에 매달렸던 투쟁민주당의 최종 성적표는 12개 정당 중 득표율 1위였지만 18.95%에 그쳤다. 2위 골카르당의 득표율은 14.75%, 3위 그린드라당은 11.81%로 투쟁민주당의 기대만큼 차이가 크지 않았다. 곧바로 '조코위 효과는 거품이었다'는 말들이 돌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정치전문가와 언론은 투쟁민주당이 '위대한 인도네시아(Indonesia Hebat)'를 선거 구호로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며 그의 딸 메가와티와 손녀 푸안 등 '수카르노 혈통'을 내세웠지만 정작 2014년 선거 돌풍의 주인공 조코위를 활용하지 않았던 점을 지적했다.
총선을 전후로 조코위 뒤를 쫓던 그린드라당의 대선후보 프라보워의 지지율은 오름세로 돌아섰다. 인도네시아 정치지표(Indikator Politik Indonesia)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4년 3월 조코위의 지지율은 55.7%, 프라보워는 20%에서, 4월 9일 총선을 전후해 조코위 지지율이 43.7%까지 떨어지고 프라보워는 26.1%로 올랐다. "프라보워가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니 끔찍하지 않니. 진짜 외국으로 나갈까봐, 한국 대선 때는 어땠어?" 자카르타 남부의 위성도시 데폭(Depok)에 사는 시사주간 <뗌뽀> 영어판 기자 파니(27)는 프라보워의 지지율 상승 소식을 담은 신문과 온라인 뉴스를 볼 때마다 고개를 가로 저었고 외국인 친구를 만나면 그쪽의 사정은 어떤지 묻고 하소연했다.
프라보워는 32년간 철권통치로 악명 높았던 수하르토 정권의 인권 탄압과 국가폭력의 핵심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육군특수부대 코파수스(Kopassus) 사령관이던 그는 1976년과 1991-95년에 당시 인도네시아가 점령하고 있던 동티모르에서 분리독립운동 진압작전을 지휘했다. 동티모르는 1975년 12월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선포한 지 9일 만에 인도네시아에 무력 강점된 지역으로, 이때부터 1999년 8월 30일 국민투표를 통해 2002년 5월 20일 동티모르민주공화국이 수립될 때까지 프라보워와의 악연이 이어졌다. 1997년-98년 수하르토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반정부민주화운동가들에 대한 체포와 납치를 담당했던 일명 장미팀(Tim Mawar)을 지휘했던 것도 프라보워다. 이런 그의 전력 때문에 그의 대권 가능성이 현실로 다가오자 많은 시민들이 우려를 감추지 못했던 것이다.
수하르토 시대에 살아본 적이 없고 학교에서도 배운 적이 없는 20대의 젊은 유권자들은 프라보워의 유창한 연설과 화려한 이력에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부패비리가 많고 개발 속도가 더딘 인도네시아에는 아직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권위 있는 리더가 필요하다는 말에 공감하는 것도 이 젊은 유권자들이었다. "학교에서 수카르노가 인도네시아 공산당(PKI) 대장이었고, 그래서 수하르토가 대통령이 됐다고 배웠다. 공산주의자들을 붙잡은 프라보워가 나라를 지켰다고 생각한다." 프라보워의 그린드라당이 총선을 앞두고 전당대회를 준비하던 3월 22일 저녁 자카르타 남부 붕카르노 경기정에서 만난 언론학 전공 대학생 아디(24)의 말이다. "부패한 민주당과 이슬람정당에는 질렸어. 일단 프라보워와 그린드라당은 새롭고 비리 전력이 없잖아. 군 출신이라는 게 좀 걸리지만." 영어교사 서카르(29)의 말이다.
2014년 5월 19일 조코위가 유수프 칼라 전 부통령과, 20일에는 프라보워가 하타 라자사 경제조정장관과 짝을 이뤄 대통령-부통령 후보 등록을 마쳤다. 기호 2번 조코위의 투쟁민주당은 국민각성당(PKB), 신생민족민주당(NasDem), 하누라당(Hanura) 그리고 인도네시아정의통합당(PKPI)과 연립을 구성했고, 기호 1번 프라보워의 그린드라당은 골카르당, 국민수권당(PAN), 번영정의당(PKS), 통합개발당(PPP), 월성당(PBB), 그리고 민주당과 함께 '메라푸티연합'으로 한 데 모였다. 이후 6월 4일부터 32일간의 공식선거운동 기간 내내 조코위-JK(유수프 칼라), 프라보워-하타는 신구(新舊)와 선악(善惡)이 극명히 구분되는 대결구도를 만들었다. 현장에서 쌓아온 정치적 자산만 들고 선거운동을 벌이는 새로운 스타일과, 돈과 조직으로 여론을 움직이는 오래된 스타일이 맞붙은 상황이 신구 대결이었다면, 부패비리나 과거사 전력 없이 경력을 쌓아온 정치인의 인본적 리더십과, 독재정권 아래에서 유혈 진압으로 수훈을 세워 승승장구한 군인 출신 정치인의 권위주의적 리더십이 맞붙은 선악의 대결구도였다.
조코위는 인도네시아령 파푸아 지역 '블루수칸'을 시작으로 솔로 시장과 자카르타 주지사 시절처럼 즉흥적 선거운동을 펼쳤다. 이번에도 사전 계획이나 예고 없이 주요 선거 거점을 찾아가 유권자들을 만났지만 거창한 연설이나 무대 연출은 없었다. '정신혁명(Revolusi Mental)'이 조코위가 유권자들에게 제시한 인도네시아의 과제였다. 조코위는 자신이 확인해 온 '블루수칸'의 힘과 거기서 쌓아온 정치적 유명세에 기대 전국 선거운동을 이어갔다. 그를 대선 후보로 낸 투쟁민주당은 4월 9일 총선에 선거자금과 에너지를 모두 쏟아 붓고 난 후 정작 조코위 대통령 만들기에는 소극적이었다. "투쟁민주당이 조코위 선거운동에 사람도 돈도 안 쓴다는 건 모두가 아는 얘기다. 조코위는 혼자 싸우고 있다." 시사주간 <뗌뽀> 부편집장 헤르민과 정치사회부 기자 요피는 한목소리로 투쟁민주당을 꼬집었다. 덕분에 조코위는 대중에게 '돈 없고 힘없는 정치인'의 이미지로 각인되면서 지난 인도네시아 대선 여론을 움직여왔던 '동정심'을 확보했다.
반면 프라보워는 동생 하심(Hashim)과 바크리 그룹이 쏟아 부은 선거자금을 들고 물량공세를 펼쳤다. 하심은 2012년 <포브스>가 선정한 아시아 거부 중 한 사람으로 꼽힌 사업가로 아버지의 당부에 따라 형이 정치를 할 수 있도록 자신은 사업에만 매달려왔다. 바크리 그룹은 그린드라당과 연합을 이룬 골카르당 대표 아부리잘 바크리가 총수로 있는 인도네시아의 대기업이다. 파푸아의 주도 자야푸라 중심가부터 자카르타와 인도네시아 주요 거점도시에 이르기까지 프라보워-하타 얼굴이 담긴 대형광고판과 플래카드, 티셔츠와 모자 등이 사방에 깔렸다. 프라보워는 전용 헬기를 타고 전국을 돌며 대규모 경기장이나 광장에 운집한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자원을 가져가는 외국 자본'을 비판하고 '소비하는 국가에서 생산하는 국가로'를 외쳤다.
프라보워 측은 공식 선거운동의 무대 뒤에서 암약도 펼쳤다. 2014년 5월 조코위와 프라보워 간의 지지율 격차는 15% 포인트였다. 그런데 프라보워 측이 국군 마을감독하사관(Babinsa)을 동원해 프라보워 투표를 유도한 불법 선거운동을 벌였고, 조코위가 중국계 기독교인이라는 내용의 흑색선전물 <오보르 라걋(Obor Rakyat, 민중의 횃불)>이 퍼지면서 대선 운동 막판 지지율 격차가 3%포인트까지 줄어들었다. 여기에 맞서 조코위 지지자들이 <오보르 라흐마탄 릴 알라민(Obor Rahmatan Lil'alamin, 모두를 위한 이로움)>을 배포하고, 온라인에서는 1998년 폭동 무력진압 책음으로 프라보워가 불명예 제대한 사유서를 퍼날랐다.
선거운동 기간 두 후보는 다섯 번 생방송 TV토론에서 맞붙었다. 프라보워가 미국 대선 전문 컨설턴트를 섭외해 오랜 시간 훈련된 토론용 매너를 선보일 때, 조코위는 사회자의 질문을 들으며 다리를 떨거나 미리 적어놓은 메모지를 손에 들고 더듬대며 발언을 했다. 유권자들은 6월 8일 민주주의, 깨끗한 정부와 법치주의 주제로 한 첫 번째 TV토론에서는 '엘리트와 보통사람'의 모습을, 6월15일 경제개발과 복지를 다룬 2차 토론에서는 진단과 해결책을 제시하는 '거시경제 전문가' 프라보워와, 자신이 추진해왔던 경제.복지정책을 설명하는 '실무행정가' 조코위를 봤다.
6월 22일 정치와 안보를 다룬 토론에서 프라보워는 외교.안보 현안에 대해 날선 발언을 하며 '준비된 대통령'의 모습을, 조코위는 1만 7,000여개 섬으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의 해양 통상외교 비전을 제시하는 '선견지명의 지도자'의 모습을 보였다. 6월 29일 부통령 후보간 인재개발과 과학기술에 대한 토론 이후 대선 선거운동 마지막 날이기도 했더 7월 5일 식량, 에너지, 환경을 주제로 열린 5차 TV 토론에서 조코위는 프라보워를 압도했다. TV토론 직전 붕카르노 경기장에서 열린 '두 손가락으로 인사를(Salam Dua Jari)'이라는 지지콘서트에서 약 10만 명 지지자들이 몰아준 기운을 받은 조코위의 자신감은 TV 생방송을 통해 부동층에게 전해졌다. 기호 2번 조코위를 지지하는 락그룹 슬랭크(Slank) 등 가수들이 기획하고 모금한 이 콘서트와 마지막 TV토론 후 조코위 캠프는 승리를 예감하기 시작했다. "최선을 다했다. 캠프 내부가 자신감에 차있다. (조코위가) 이길 것으로 확신한다." 5차 토론 직후 만난 조코위 캠프 공보팀장 테텐 마스두키(Teten Masduki)의 표정은 평소처럼 뚱했지만 목소리는 상기돼 있었다.
새 시대 희망과 과제 - 인권과 민주주의의 함의
2014년 7월 22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7월 9일 대선에서 약 1억 3357만 명 투표자의 53.51% 지지를 받은 조코위가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발표했다. 프라보워는 46.85%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선관위의 집계과정을 신뢰하지 않는다며 대선 불복을 선언하고 헌법재판소 소송에 들어갔다. 당선 결과를 받아든 조코위는 부통령 당선인 유수프 칼라와 함께 자카르타 북부 순다 클라파(Sunda Kelapa) 항구로 이동해 정박되어 있던 인도네시아 전통 쌍돛단배 피니시(Pinisi)에 올라 " 이 승리는 모든 인도네시아 민중의 승리다. 이 승리로 인도네시아의 정치적 주권, 경제적 자립, 문화적 개성을 이뤄나가는 길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고 당선 소감을 밝혔다. 조코위는 이 자리에서 '해양 시대 중심축 인도네시아'를 차기 정부의 비전으로 제시했다.
2014년 대선은 현재 인도네시아 시민들이 열광하는 리더십이 무엇인지, 이른바 민심을 확인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특히 정당에 의해 동원된 대중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조직된 대중이 자신들을 대표한다고 생각하는 후보를 선택해 선거운동을 벌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조코위의 대선 구호 '조코위는 우리다'는 이런 분위기를 영리하게 반영한 것이다. 조코위의 대선 승리는 정당의 조직력이나 자금력이 아니라 자발적 지지자들이 소액 모금을 통해 선거운동자금을 마련하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조코위 지지를 호소한 덕분에 가능했다. 실제로 대선 기간 조코위 캠프의 주요 과제는, 선거운동을 돕겠다고 나서는 시민들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공개적으로 조코위를 지지하는 가수와 배우 등 연예인의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소셜 미디어의 파급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였다. 이런 현상에 대해 시사주간 <뗌뽀>는 '자발적 지지자들의 비중 있는 역할이 2004년 첫 직선제 대통령 선거와 2014년 대통령 선거를 구분 짓는 특징이다'고 평가했다. 민주주의가 대표성과 참여를 전제로 하는 제도라면, 인도네시아 유권자들은 2014년 대선을 통해 민주주의의 작동원리를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셈이다.
수하르토 치하에서 자행된 인권탄압과 국가폭력의 상징인 프라보워를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던 시민사회는 일단 안도하고 있다. 그러나 수하르토의 화신이 강력한 대선 후보로 부상했다는 사실, 그가 대선 패배 후에도 의석 63%를 차지하는 거대 야당연립을 주도하고 있는 현실은 시민사회의 걱정거리다. "국가인권위원회 등 국가기구가 나서서 국가폭력 사건 진상을 규명하지 않는다면, 프라보워 같은 가해자들은 언제든 다시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인권단체인 임파샬의 풍키 인다르티(Poengky Indarti) 소장은 과거 인권탄압과 국가폭력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보다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다면 시민 사회 단체가 모여 장기적으로 '망각에 저항하는 대중운동(Gerakan Rakyat Melawan Lupa)'을 이어나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과거사 진상규명'은 일단 조코위가 대통령에 당선돼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됐다. 프라보워가 대선 후보 공약집에서 인권문제를 '인권보호 강화' 차원으로 얼버무렸다면 조코위는 9개 우선 과제(NAWACITA) 중 네 번째인 사법기구 개혁 과제의 세부항목으로 '역사적 인권 탄압 문제 해결'을 명시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기간에 조코위와 칼라는 인권재판소 설치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인 인권탄압 관련 사건은 1989년 탈랑사리(Talangsari) 민간인 학살사건과 1998년 5월에 벌어진 중국인 공격 등 최소 7건이다. 그러나 과거 국가폭력과 인권탄압 진상조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들이 조코위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헨드로 프리요노(Hendro Priyono) 전 국정원장, 위란토 전 통합군사령관, 수티요소(Sutiyoso) 전 자카르타군사령관과 리아미자드 리아추두(Ryamizard Ryacudu) 전 육군전략예비사령부(Kostrad) 사령관 등 네 명이 그들이다. 헨드로 프리요노는 2004년 변호사 출신 인권운동가 무니르(Munir) 독살 사건 지휘 의혹과 함께 1989년 탈랑사리 민간인 학살 사건 지휘 의혹도 받고 있다. 위란토와 수티요소는 1998년 5월 봉기 진압과정에서 민주화운동가 납치를 지휘한 혐의가 있다. 위란토의 경우 동티모르 학살, 자카르타 트리삭티 대학 시위 진압 발포 명령 책임자라는 의혹도 받고 있다. 리아미자드 리아추두는 메가와티 정권의 자유아체운동(GAM)과 자유파푸아운동(OPM) 등 분리독립운동에 대한 유혈진압 작전을 담당했던 전력으로 인권단체의 비판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이 네 명은 각각 조코위 인수위원회 자문위원(헨드로 프리요노), 조코위 연립여당 하누라 총재(위란토), 연립여당 PKPI 총재(수티요소)와 조코위 1기 내각 국방장관(리아미자드 리아추두)으로 조코위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이와 함께 '개혁'이라는 인도네시아의 과제 역시 앞날이 순탄치 않아 보인다. 조코위가 의회의 동의와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게 된 탓이다. 132석 지방대표회의(DPD)와 560석의 국민대표대회(DPR)로 구성되는 상원 격의 국민협의회(MPR)에서 프라보워의 메라푸티연합이 347석으로 조코위 연합의 330석보다 수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
메라푸티연합은 대선 직후 5년간의 영구연합을 선언하며 똘똘 뭉쳤고, 조코위는 10월 20일 정부가 출범하기도 전에 의회에서 이 야당 연합에 다섯 번이나 밀렸다. 메라푸티연합이 추진한 MD3(MPR, DPR, DPD) 법과 지방선거법 개정 저지에 실패했고 이를 막으려 조코위 연합이 헌법재판소에 제소했지만 이마저 기각됐다. MD3법은 총선에서 가장 많은 의석을 점유한 정당이 자동으로 의장직을 맡도록 정한 법으로 메라푸티연합은 이 규정을 삭제했고, 지방선거를 직접선거로 정한 지방선거법을 간접선거로 돌리려는 개정안을 발의했다. 조코위 연합은 DPR 의장선거와 MPR 의장선거에서 모두 패배해 의회 주도권이 메라푸티연합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들은 조코위의 대통령 취임식을 저지하겠다는 물리적 위협을 할 정도로 자신감을 쌓아놓은 상태다.
일하는 정부 Kabinet Kerja
"어부, 노동자, 농부, 박소(고기완자) 장사, 거리 노점상, 운전사, 학자, 교사, 군인, 경찰, 상인과 정문가 여러분, 저는 여러분에게 열심히 일하고 화합(Gotong Royong)할 것을 촉구합니다. 지금은 우리 모두가 함께 나아가고 일하고 일하고 또 일하기 위한 역사적인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10월 20일 자카르타 남부 스나얀에 위치한 국민협의회(MPR)당에서 인도네시아 7대 대통령 취임식이 열렸다. 조코위 취임선언문의 열쇳말은 '일'이었다. 시민들에게 "다 같이 열심히 일하자"고 당부하며 "모든 시민이 정부의 존재를 느낄 수 있도록 나의 정부도 열심히 일하겠다."고 약속했다. 10월 26일 발표한 조코위 1기 내각의 명칭은 '일하는 정부(Kabinet Kerja)'다. 당선 소감 때와 마찬가지로 조코위 대통령이 인도네시아에 제시한 비전은 '해양시대의 중심축 인도네시아'다. 그래서인지 1기 내각 34명의 장관 중 해양어업부장관 인선이 가장 큰 화제를 만들었다. 인도네시아 저가항공 수시에어(Susi Air) 최고경영자 수시 푸지아스투티(Susi Pudjiastuti)가 그 주인공이다. 수시는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생선가공사업, 바다가재 식품 사업 등을 거쳐 밑바닥부터 자수성가한 사업가다. 그녀 자신도 놀랐다는 해양어업부장관 인선은 기존의 엘리트 출신 대신 현장에서 성공한 '일 잘하는' 인물을 골랐다는 점에서 '조코위 스타일'을 엿보게 한다. 수시가 조코위 1기 내각 발표 현장에서 담배를 피웠다거나 몸에 있는 문신을 옷으로 가리지 않았다며 비난하는 여론이 있었지만 조코위는 개의치 않았다.
조코위 정부의 5년은 당과 의회의 지원을 얻기 힘든 여정이 되겠지만 그에게는 든든한 지지세력이 있다. 조코위를 대통령으로 만든 평범한 시민들이 그들이다. 대통령 조코위가 솔로 시장과 자카르타 주지사 시절과 마찬가지로 블루수칸과 대변인을 두지 않고 직접 언론과 소통하는 '조코위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는 까닭에 그에게 열광하는 시민 지지세는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대중의 신임을 받은 배의 선장으로서 나는 여러분 모두가 인도네시아라는 배에 올라타 위대한 인도네시아(Indonesia Raya)를 향해 항해할 것을 촉구합니다." 조코위 대통령 취임사 마지막 문장에 그런 자신감과 의지가 담겨 있다.